통일이 오면

 

 

                                        차 례

 

                                         들어가는 말

                                         민족사적 관점

                                         후천 개벽의 시작

                                         3.1 독립 선언의 실현

                                         외교 전통의 혁신

                                         동아시아 안보 체제의 시작

                                         경제, 사회, 문화

 

 

들어가는 말

 

1800년대 후기에 서울에 와서 살던 서양 외교관들이 새로 만든 테니스 코트

에서 정구(테니스)를 치면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것을 신기한 듯 구경하던

당시의 조선 양반들이 돌아서면서 "하인을 시키면 될 텐데 쓸데없이 고생한다"

고 서로 수근 거렸단 말이 전해 온다. 그 당시 건강 관리를 위해서 각자가 하는

운동 경기 조차도 우리 조상들은 남들이 해주기를 기대하는 습성에 젖어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후 백년이 훨씬 지난 2000년대의 오늘날에도 우리

국민 사이에 나의 일을 남이 해주기를 기대하는 습성은 별로 바뀐 것 같지

않다.

 

우리 정부나 국민이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통일이 3년 후에 저절로

될 것 이라고 예언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국제 정세가 돌아가는 모양을

보니 그럴 것 같고 1945년의 해방도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갑작이 왔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통일은 안된다고 하면서, 그 이유는 김정일이 반대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밖에 일본이 반대한다, 미국이나 중국이

반대한다, 러시아가 반대한다 등등, 자기 자신은 차치하고, 다른 사람들

또는 다른 세력이 반대할 것이라고 가정 하면서, 통일의 전망을 부정적으로

또는 소극적으로 그 안되는 이유를 거론 하는데 열심이다.

 

이 글의 제목을 "통일이 오면" 으로 한 것은 우리 국민들이 공통적으로

통일을 염원할때 관습적으로 선호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용어로 제목을

붙여 본 것이다. 그러나 통일은 는 것이지 는 것이 아니다. 감을 따려면

감나무에 직접 올라가 따야 내것이 되지, 감나무 아래에서 입 벌리고 누워

있으면서 그감이 익어 입 속에 떨어질 것을 기대 하여서는 안된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 잡아야지, 호랑이 굴 주변을 돌아 다닌다고

해서 호랑이가 잡힐리 없다.

 

통일은 적극적이고 긍정적 자세로 성취하려고 노력하여 비로소 달성 할수

있는 소중한 목표이다. 남들이 통일을 거저 가져다 줄리 없다. 따라서

여기에 "통일이 오면" 이라고 쓴 제목은 독자들이 "통일을 하면" 이라는

뜻으로 새겨줄 것을 전제하면서 이 글을 쓴다.

 

민족사적 관점

 

단편적이기는 하나 지금까지 알려진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현재 한반도에

살고 있는 한민족의 조상은 이른바 북방 기마 민족의 후예들이었음이 거의

틀림없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조상들이 유라시아 대륙 북쪽의 중앙아시아

근처에서 동쪽으로 또 그후에는 남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주변의 다른

여러 민족들과 꾸준한 접촉과 교류가 있었을 것임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 터키 국의 기록된 역사가 만주 (지금의 중국 동북지방) 내 북방의

대흥안령 계곡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서쪽으로 이동하여 현재의 아나돌루

(Anatolia) 반도에 정착하게 된 유래를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 민족의

이동 경로와 상호 반대 방향이어서 흥미롭다.

 

우리 민족의 경우 우리의 고문헌이 주로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어 중국의

고전과 혼재하고 뒤섞이는 인상을 준다. 한민족과 같은 알타이.우랄 어족의

공통점은 한자와 같은 고대로 부터 발전한 고유의 언어를 갖지 않은데 에서도

발견할수 있는데, 그렇다고 하여 말 그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중국의 한자가 중원에 공통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때가 진시황시대

부터이니 그 이전에는 중국인이나 북방기마 민족이나 그 역사는 한자 이전의

고문자나 구전의 형식으로 전승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우리의 언어 중에 한문이 7,8할 이라고 하는 것은 한자가 우리 민족에게

전래하여 우리말을 기록하는데 당시의 문자인 한문을 이용하여 전사한데서

조성된 부수적 현상이고, 한국어와 중국어는 당초에는 각각 한 마을에 사는

이웃 사람들 처럼 병행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점차적으로

변천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컨대 터키어와 한국어는 물을 "수"라고 하는데, 한자의 "수(水)"를 전수한

것으로 알기 쉬우나, 그 반대로 알타이어계의 "수"가 한자의 "수(水)"로

전용되지 않았다고 단정할수 있겠는가?  한민족 등 북방기마 민족의 후예들이

중국의 한자 보다는 늦었지만 각각 자기 고유의 문자를 고안해서 사용하기

시작 하였고, 우리의 훈민정음(한글)도 그러한 과정에서 탄생하였다고

하겠다.

 

이 처럼 문명사적으로 고대에 중국의 중원에 못지않은 발전 단계와 발전

과정을 거친 우리 조상들이, 고조선과 고구려 시대의 역사가 입증하듯이,

동북아시아에 강대한 독립국을 이루어 주변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 하면서,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였던 시기가 천년이상 계속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유라시아 대륙의 동방에 이르렀던 우리 민족의 주류는 일기가 불순한 북방

보다는 기온이 온화한 남쪽을 선호하여 점차 남향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조선시대 특히 임진왜란 이후에 우리 조상들의 관심을 모은 정감록(鄭監錄)의

십승지지(十勝之地)가 모두 남한에 있는 사실이 이러한 남방 선호 경향을

반증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조선조 5백 여년의 영역을 한반도에

한정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부터

약 150년 전에 시작된 고종 시대에 이르러 지난 수천년간 우리 민족의

삶터가 되어온 한반도의 독자적 유지 조차도 어렵게 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이 조성된 원인에 대하여 논자에 따라 여러가지

해설이 있다.

 

그러나 이를 근본적으로 외세의 공세 때문 이라고 그 책임을 외부에 전가하기

보다는 우리민족 자신의 영토관리 능력의 부실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진정한 새로운 출발은 냉엄한 자기 반성 위에서만 가능하다. 사태의

책임을 모두 남에게 전가하는 것은 암암리에 구태의연한 행태를 고집

하겠다는 뜻이 되는 것이며 이러한 민족에게는 장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5천년 역사상 가장 큰 불행은 19세기 후반 부터 시작된 일제의

한반도 강점과 그 기간에 자행하였던 민족 말살 시도이었다. 1945년 8월

일제의 무조건 항복 직전 까지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회고해 볼 때, 우리

민족은 적어도 한반도 내에서는, 우리말의 사용을 거의 전적으로 금지

당하였고, 우리의 성명 조차도 거의 모두가 일본 식으로 바뀌었다. 일제

말기에 이르러 국외에 사는 동포는 적지 않았지만 그 수는 일제 관할지역

내에 있는 우리 국민의 수에 비하면 소수 이었고, 그 중에서도 항일 투쟁을

계속하고 있던 동포의 수는 더욱더 소수에 한정 되었고 그 영향력도

미미하게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 민족이 일제 말기 처럼 철저한

민족 말살 정책의 희생물이된 시기는, 필자의 연구 부족이 아니라면,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시기 중에서 미증유의 것이었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은 일제의 동화정책으로 인하여, 일제의 지배가 더 연장 되었더라면,

그들의 2등 국민이 되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임을 쉽게 예견할수 있을 정도

이었다. 이처럼 일제가 한반도의 주권을 침해하고 사실상 주인 노릇을 시작한

것은, 일본 해군 함정 운양호가 부산항에 불법 입항하여 행패를 부리기 시작

하였던 1875년 부터 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일제는 1945년 8월

15일 까지 장장 70년 간이나 한반도를 유린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때 일제

35년 이란 그 반 만을 계산한 숫자에 불과하다. 특히 이기간 중에는 1884년

임오군란 때부터 1894년 청일전쟁 발발시 까지의 10년간 원세개가 청나라의

감국(監國)으로서 서울에 상주하여, 일제 세력과 경쟁 하면서, 후일의 일본

통감(統監)과 유사한 행세를 하던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울러 유념할

필요가 있다.

 

1945년에 군국주의 일제의 패망으로 일제는 한반도에서 물러났다. 이는 무엇

보다도 미.소 등 연합군의 군사적 승리가 그 결정적 요인 이었다. 예컨대

당시 중경에 있던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한반도 해방에 한층더 적극 동참하고

더 나아가서 연합국 정부로 부터 망명정부와 망명군대로서 승인을 받았다면,

일제의 패망에 따라 조성된 한반도내의 공백 상태에서 국내적 질서유지와

정부 수립의 임무를 담당할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이무렵에 드골 망명

정부가 불란서를 나치 독일로 부터 수복한 예에 비유할수 있다.

 

그러나 중경, 연안, 만주 등지에 있었던 우리의 망명정부는 모두가 연합국

중 어느 나라로 부터도 그러한 동참의 기회나 승인을 얻지 못했다. 그리하여

당시까지 항일 독립 운동을 계속하고 있던 애국지사들은 예외없이 미군정

당국에 의하여 개인 자격으로 뒤늦게 남한으로 귀국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반면에 38선 이북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은 소련 점령군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 직전에 일본 총독부의 위임을 받은 여운형 등이 전국적으로

조직하기 시작하여 당시에 북한에서 질서유지에 임하고 있었던 소위 인민

위원회를 재빨리 앞세우고 내정에 직접 간섭하기 보다는 배후에서 이를

조종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소련군정 당국은 또한 소련령 연해주에서 소련군과 함께 북한에 돌아온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육성하기 시작하였다. 사태의 이러한 뜻하지

않은 진전은 현재와 같은 남북한 양정부의 분립을 초래 하였다. 잇따른

6.25동란에서 동족 상잔을 강요하였고 전쟁과 휴전의 국제화 현상을 고착

하였다. 해방이후 60년이 경과한 오늘날 남한의 대한민국은 국민들의 근면과

노력으로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구가하게 되고 자유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세계를 놀라게 할 정도로 발전 시켰다. 그반면에 북한에는 명목상 공산주의

체제라고 하나 실제에 있어서 김일성으로 시작하는 시대 착오적 김씨 왕조가

구성되어 제2대인 김정일이 "선군정치" 운운 하면서 병영 국가를 강압적으로

지속 강화시키고 있다.

 

북한 독재 정권은 2천 3백만 북한 동포들의 의식주 문제 조차도 해결하지

못하여 남한 등으로 부터의 구호 물자에 의존하는 상황에 있으면서도 1960년

대부터 핵무장을 꾸준히 준비하다가 최근에는 핵실험 사실을 국내외에

공표하여 한반도를 위시한 국제적 긴장을 고조 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김정일의 최후 발악이 남한과 미.일.중.러 4강의 일치된 반대를 버티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것임이 분명하다.

 

우리 국민운동 본부가 제시하고 있는 새로운 통일로선에 따라 한반도가

통일 되어야만, 한반도는 1919년 3.1운동 당시 선포한 독립선언서에 명기된

바와 같은 완전 자주독립 국가를 비로소 이룩할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한반도의 남북에 두개의 정부가 병존하는 현상을 이이상 감내할수 없고 또한

감내 해서도 안된다. 우리 정부가 떳떳하게 남북통일 문제를 6자 회담에 정식

의제로 상정하게 되면 그때부터 5년 이내에 우리에게 가장 유리한 형태로

평화롭게 통일을 이룩할수 있다고 감히 말할수 있다.

 

그렇게 되면 북핵 문제는 자동적, 근본적으로 해소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국내외 동포 천만명 이상의 적극적 지지가 필요하다. 이러한 국민적

여망의 결집은 북한 정부는 물론 미.중.일.러 4강으로 하여금 우리 정부의

의사를 존중하도록 설득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작용을 할 것이다. 반만년

역사상 우리 민족은 지금 이상 남쪽으로 내려갈 땅이 없다. 현재의 남한 땅은

4천8백만 남한 인구가 살기에 너무나 협소하다. 더욱이 인류의 과학.기술

문명이 고도로 발전하게 된 오늘날 따뜻한 남쪽만을 선호할 이유는 거의

없어졌다. 우리 민족은 방향을 180도 바꾸어 반만년전의 고향이 있었던

북쪽을 평화적으로 지향할 시기가 왔다. 한반도의 통일은 그러한 민족적

방향 전환의 계기가 될 것이다.

 

후천 개벽의 시작

 

1860년 부터 포교하기 시작한 동학교조 최제우는, 우리의 역사를 선천 개벽과

후천 개벽으로 크게 나누어, 선천 개벽은 5만년 전에 있었고 이제 그 기력이

다 하였으므로, 그대신 금후 새로운 5만년을 시작하는 후천 개벽이 필요함을

역설 하였다. 최제우는 그당시의 민란과 사회적 혼란, 부정부패, 지도력 미숙,

외세의 접근 등 복합적 상황에 비추어 후천 개벽을 하여야만 우리 민족이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이러한 원대한 민족적 비전 제시는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경청할만한데가 있었고, 14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졸고있는 사람들의 눈을

뜨게하는" 그 무엇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제우는 1864년에 사문난적의

죄를 범하였다 하여 대구 감영에서 교수형을 받았고, 1894년의 동학 농민

봉기는 당시 조정과 청.일 외세의 탄압으로 수많은 동학교도들이 무참히

희생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이후 지금 까지도 동학에 대한 찬반 논쟁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주장하는 6자간의 한반도 (반반이 아닌) 전체에 대한 집단안전보장

조약의 체결을 통한 한반도의 궁극적 통일은 지난 100여년 간에 일어났던

청.일 전쟁, 러.일 전쟁, 한국동란 등으로 한반도에 형성된 국제적 성격의

중층적 제약 상태를 우선 청산하고 극복함으로써 한반도 분단 문제의

한반도화를 이룩한 다음에, 주변 4강과의 (배척 관계가 아니라) 협조 관계를

유도하고 지속 하면서, 국내 정치문제(남북의 두정부를 하나로 만듦)와

군사문제(남북한 군대를 통합, 구조 조정하여 한반도 주변에 대한 국방을

튼튼히 하는 동시에 휴전선을 철폐함)를 단계적으로 해결하는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이를 3단계 통일로선이라 할수있다.

 

이 통일로선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한반도 위에 상존하고 있는 국제적

양자대결 구도(한미 방위조약 대 북중 방위조약)를 대채할 국제적 다자협력

구도(한.미.중.러.일.북 6자간의 집단안전보장 조약)를 먼저 이룩한 다음에,

한반도 내부의 양자대결 구도를 청산 하자는 것이다. 이를 한반도를 위요한

국제 관계의 새판짜기 라고 할수있다. 위의 "민족사적 관점" 항에서 우리는

역사적 지리적으로 우리 민족의 오래된 남향 추세가 이미 이이상 지속될수

없게되어 그 바닥을 쳤으므로, 향후에는 북향 추세로 나아갈수 밖에 없음을

설명 하려고 노력했다. 이 "후천 개벽의 시작" 항은 이러한 추세와 궤도를

같이하는 사고(思考)에 입각하여 우리 민족의 민족적 사기(士氣)가 지난

역사 과정에서 답습할수 밖에 없었던 하향곡선도 또한 이미 바닥을 쳤으므로

(이를 동학은 선천 개벽의 종결로봄), 이제 심신을 가다듬어 새로이 일어설때

(후천 개벽의 시작) 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후천 개벽의 시작은 6자간의 집단안전보장 조약의 발효와

더불어 오게될 한반도 문제의 한반도화가 그 시발점이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 민족이 한반도 통일을 어떤 과정을 거쳐 달성하게 되느냐라고 하는

통일 노선의 문제는 후천 개벽의 시작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게 될 것임을

특히 유념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후천개벽은 그 영향의 범위가 우리

민족과 한반도에 한정될 수 밖에 없다는 점도 처음부터 인정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우리 민족의 장래와 한반도내의 상황

변화가 다소간에 주변 4강을 비롯하여 국외 나아가서는 세계적으로

영향하는 바는 없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컨대 미.중.일.러 등 우리의 이웃 나라와 그 민족들이 한반도의

후천개벽 시작에 따른 한반도 내의 커다란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의

문제는 전적으로 이들 이웃들의 문제이며 우리는 그에 적절히 대응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이와 관련하여 한반도와 그 주인인 우리 민족은 지난 긴

역사상 결코 대외적으로 팽창적 침략적이라 할수없는, 다시 말하면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적이고 평화적 전통을 고수 하였다는 점이 중요한

고려요소가 될 것이다. 따라서 그 후에도 한반도는 이웃 4강에 대하여

불편부당하고 공평한 우호 관계를 지속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에 관한

다른 논문에서 이미 강조한 바와 같이 한반도의 후천개벽의 시작이 아시아

나아가서는 세계의 안전과 평화를 위하여 긍정적 적극적으로 기여할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3.1 독립 선언의 실현

 

1919년 (기미년) 3월 1일에 인사동 태화관과 종로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

선언문이 국내외에 발표되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비폭력, 무저항, 평화의

3대 행동 강령에 따라 한반도 도처에서 자주독립을 위한 민중의 시위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 되었다. 천도교, 개신교, 불교 등 각계 지도층과 보성학교

등의 교사와 학생들의 치밀하고 조직적인 사전 준비가, 일제 주구들의 세심한

감시를 극복하고, 마침내 성사된 것이었다. 일제는 한반도를 강점한 후

국제적으로 우리 민족의 자치 능력을 비하하고 국민들이 일제의 통치에

만족하고 있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3.1.독립 운동은 일제의 이러한 강변이 허위였고, 우리 민족은 결코 외국의

압제에 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나아가서 세계적으로 모범이 될 만한

독립국을 능히 이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역사적

쾌거이었다. 일제는 이에 크게 당황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는 우리 동포들에게

온갖 만행을 저질렀고, 마침내 그때까지의 강압 정책을 완화하고 형식적으로

나마 소위 문화통치를 내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독립만세 운동의

와중에서 국내의 유학자 (유림)들도 다수 희생 되었지만, 유림의 지도층이

당초에 독립선언문 서명에의 동참을 거부한 것은 옥의 티와 같이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이 독립 선언서 발표를 계기로 하여 국내의 독립 운동가들이 결집하여 망명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항일 운동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일제는 1945년 8월

무조건 항복할 때까지 국내외의 독립 운동을 탄압하고 말살하는데 혈안이

되었고, 그 사실 조차도 음폐하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해방후 우리의 신진 역사학도들의 노력으로 일제가 감추려고 하였던 역사적

사실을 규명 하는데 그동안 많은 진전이 이룩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또한 국민적 독서 노력의 축적으로 이 시대의 진상이 국민들 사이에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점에 있어서 국내의 각종 도서관 시설이 기여한 바도

적지않다. 서울의 정독 도서관, 남산 도서관, 용산 도서관 같은 시립도서관도

여기에 포함된다.

 

기미 독립선언은 그 이후의 많은 노력과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고있다. 1948년에 북위 38도선 남북에 각각 단독 정부가 수립

되었으나, 이는 진정한 국민의 총의에 따르는 통일정부가 아니었다는 점에

있어서 불완전한 것들이었다고 할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후 2년도 못되어

엄청난 피해를 동반한 6.25 동란이 일어났고 이 전쟁은 순식간에 국제전으로

확대 되었다. 당시의 정국을 지배하였던 남북한 지도층의 오판과 단견으로

초래된 이 동족상잔의 참화는 국내외적 난맥 상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던

우리 민족에게 평화통일을 저해하는 또 하나의 장애 요소로 오늘날 까지

남아있다.

 

우리 정부가 우리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는 가운데 남북 통일 문제를 6자

회담에 정식 의제로 상정하게 되면, 이는 획기적인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첫째로 우리가 복잡다단한 국제 정세의 추이에 좌우되는 수동적이고

소극적 상황을 넘어서서, 우리가 나아갈 정당한 통일노선을 자주적으로

개척하여 이를 실현하는데 필요한 전제 조건으로서 주변 4강과 북한에

대하여 이 노선에 협조할 것을 능동적,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는 6자회담의 정회원국으로서 그러한 국제적 요구를 할 수 있는

권한과 책임이 주어져있다.

둘째로 현재 한반도의 중간 지대를 관통하고 있는 휴전선을 경계로 하여

대치하고 있는 미국과 중국간의 대결 상황을 극복하는 대안으로서 한반도

전체에 대한 미.중.일.러.남북한 6자간의 다자간 집단안전보장 체제를 국제

사회에 제시하는 것이다. 환언하면 한반도 주변에 형성된 국제 관계의 판도를

한반도 통일에 순기능을 하게되는 새로운 판도로 바꾸자는 것이 된다.

셋째로 주변 4강중 어느 나라도 한반도 때문에 또다시 전쟁 하기를 원하지

않고있고 어디까지든지 평화적으로 대처하고자 원하고 있다. 그러나 각국이

목전의 국가 이익에 급급한 남어지 한반도에 살고있는 우리 국민의 이익을

앞세우는 장기적 해결책에 어느 나라도 적극적으로 나서려고 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편 북한정권의 한반도 통일에 대한 열의 자체는, 비록

그들이 공산화를 선호하겠지만, 남한을 능가할 정도이고, 7.4 공동성명 당시

부터 통일 문제에 관하여 정치, 군사 문제의 선결을 주장해 왔다. 따라서

우리의 이러한 제안을 주변 4강은 물론 북한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적극 호응할 것으로 기대된다. 6자회담 참가국들을 과거의 북방 3각 관계와

남방 3각 관계에 관여해 온 나라들로 구분해 보면, 숫자상 3대3 으로 균등

하므로 북한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

넷째로 6자 회담은,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볼 때, 1948년 정부 수립이래

처음으로, 세계 최강국들 이라할 주변 4강과 동등한 정회원국 자격으로

참가 하게된 이 지역의 주요하고도 유일한 국제회의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회원국 자격으로 북한 등 다른 회원국의 동의가 없드라도 우리가 원하는

의제를 상정할 독자적 권한과 책임이 있다. 이에 관하여 어떤 다른 회원국도

반대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유연성과 탄력성이 있는 자세로 추진해

나갈 필요가있다. 사전에 협의가되어 우리와 함께 다른 회원국들과 공동으로

상정할 수도 있을것이다. 아무튼 우리의 의제 상정권은 오랜 국제회의 관례상

으로도 우리의 권한 행사이므로 어느 다른 회원국도 저지할 수 없는것이다.

요컨대 남북 통일이되면 이는 지난 80여년 전에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높이

외치면서 죽어가신 남녀노소 선열들, 온갖 고문과 감옥 생활을 강요받은 민족

지도자들, 국내외에서 항일독립 투쟁중에 희생된 남녀 애국자들의 원혼을

달래 드리는 것이며, 그 분들이 지하에서 나마 기뻐하실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외교전통의 혁신

 

우리 국민들이 일반적으로 전통적 우방이라고 할 미국 국민이나 일본 국민에

비하여 왜 국제정치와 외교에 관한 이해도가 뒤떨어지는지에 대하여 먼저

생각해 보기로 한다.

 

오랜 옛날은 고사하고 조선조시대 만을 회고해 본다면, 한반도 주변의

국제정세와 그에 대응한 조선의 외교활동은 이른바 왕실 외교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즉, 국왕을 정점으로 그의 신임을 받는 소수의 대신들이

주역들이었고 그들을 보좌하는 역관 등 소수의 기술직 중인들 그리고

이들을 돕는 잡역의 하인들, 그밖에 외교행사 때 물물교류를 맡았던

어용상인들이 거의 전부였다. 게다가 외교는 국가기밀 사항으로 취급되어

외교에 직접 관계하는 한정된 소수만이 그 내용을 알 수 있을 뿐이었고

그외의 국민들은 풍문 등으로 접할 수 있을 뿐이었다. 또한 일부 국민중에

조정에서 하는 외교 행태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게 되면

조정은 이들을 역적으로 취급하여 3족을 멸하는 형벌을 가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국민들 대다수는 유구무언, 알아도 모른체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우리나라 국제정치의 주요 대상이었던 중국 본토에 만주족의

청나라가 군임하고 바다건너 일본에서는 이른바 막부 정치가 장기간

진행되었다. 제정 러시아가 연해주를 접수하여 한반도와 접경한 해가

1860년 이었던 사실에서 알수있는 바 와같이 지금의 동북3성(구 만주)과

연해주 지역은 그 당시까지 무주지라고 할 정도로 국제적 경계선이 분명히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나라 당시 조정은 이른바

공도(空島) 정책을 택하여 국민들중 한반도 주변의 살기 어려운 섬이나

북방 인접지역에 가서 사는 사람들을 설득하거나 강제적 방법으로

살기좋은(?) 한반도 본토로 복귀하여 살도록 조치하고 있었다. 귀양이나

추방되는 경우는 물론 예외이었다. 서구적 입장에서 볼 때 당시 동아시아

특히 한.중.일 3국의 경우 시기적으로 아시아적 정체기가 진행중이었고,

교통, 통신 등 여러가지 제약이 있었다. 따라서 한반도적 관점에 의하면

이러한 국제 관계가 곧 전세계적 관계로 인식될 만큼 그 시야는 한정되고

모호한 데가 있었다.

 

이 무렵의 미국은 몽골계통의 원주민들이 수만년전부터 살고있던 땅인

북미대륙에 서유럽 여러나라의 청교도들이 이주하기 시작하여 형성되었다.

미국의 원주민들은 초기에 이들 백인계 이주민들의 정착을 도와주기도

하였는데, 유럽계 이주민들은 그후 큰 세력을 이루어 몽골계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땅을 차지하였다. 이제 이들 원주민 수는 급감하여

수십만명 정도를 헤아리게 되었고 미국내의 한정된 원주민 보호구역에

그 대부분이 살고있다.

 

초기에 정착한 유럽계 미국인들은 원래 당시의 유럽사회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멀고 먼 대서양을 건너는 모험을 감행한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마침내 영국과의 독립 전쟁을 거쳐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 독립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시민혁명을 거치게 되었고 그후에

수많은 전쟁에 참가 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인에 대한 문인우위(civilian control)

의 전통을 견지하면서 오늘날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를 누리고있다. 그러나

미국의 힘을 결코 과대평가 해서는 안된다. 미국은 현재 국력의 한계를 넘는

영향력을 국제적으로 행사하고 있으나, 장기적으로 전망할 때 제2차 세계대전

이래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세계 도처의 신흥 제국 세력에 대한 미국의

상대적 국력은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유럽의 국제관계와 긴밀한 유대를 유지해 왔고,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때 한반도의 남부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3년간 군정을 실시한 것을 계기로

하여 한반도에서 서구 세력을 대표하는 지위를 획득하였다.

 

일본의 경우를 보면, 일본인들은 그 본류가 한반도에서 온 이주민들의

후손이고 명치유신 이전 까지는 문화적으로 중원과 한반도를 스승의 나라로

알고 있었다. 일본은 명치유신을 거치면서 구미선진 문명을 과감히 도입하여

입헌 군주제를 현대화하였다. 일본제국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등 주요 전쟁의 주도국으로 부상하여 일찍부터

국제정치의 경험을 쌓았다.

 

3년전에 미국의 주도로 6자회담이 열리자마자 일본은 재빨리 일본인

납북문제를 6자회담에 정식의제로 상정하여, 고이즈미 전수상이 2차에 걸쳐

평양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일본 국민에게 충격을 준 (그리하여

국제정치의 실상에 대한 국민들의 눈을 뜨게한) 사건은 1895년의 3국간섭

이었다. 일본은 이 경험을 거울삼아 한반도를 병탄하는데 있어서 사전에

당시의 국제적 지도 국가인 영국과 미국의 사전양해를 얻는 세심함을

체득했던 것이다. 오늘날 일본은 미국과 밀착하는 대외정책을 지속하고

있는데, 이는 일본의 국익을 염두에 둔 장기적 포석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은

섬나라이고 한반도는 대륙국가이므로 한반도가 일본열도의 대미정책을

모방하여서는 안된다. 우리는 우리의 독자적 대외정책을 수립해 나가야

할것이다.

 

일본은 무인(사무라이) 우위 전통을 뿌리깊게 간직하고 있는 나라이다.

이른바 명치유신은 군사혁명에 다름아니었다. 청일전쟁 때부터 일본 국내

정치적으로 노골화된 군인우위 체제는 마침내 1945년 일제의 패망과 무조건

항복을 초래하였다. 전후 60여년 간의 일본 정치는 또다시 과거의 군국주의적

경향을 극복하지 못하는 상황을 재연하는 듯하여 우려스럽다. 일본이 정치적

으로 선진화하기 위하여서는 구미의 선진국들 처럼 시민혁명을 일으켜 현존

체제의 근본적 구조 조정을 성공시키는 과정을 체험할 필요가 있다. 남한은

명치유신에 비유할수있는 군사혁명을 경험하였을 뿐아니라, 정치의 민주화를

이룩한 점에 있어서 자민당 영구 집권 형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일본을

이미 앞지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시민혁명의 성공이라는 과제는

일본 뿐아니라 한반도에도 필요하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일 양국민에게

공통되는 장래를 보게 된다.

 

이들 미.일 두나라와 비교하여 볼때, 대한민국의 현대 국제정치와 외교적

경험은 어떠하였는가?  한반도에는 일찍부터 서구라파의 신흥문명이 직접

간접으로 전래하여 이를 이해하고 실용화하려는 선각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전통적 사대주의 사고에 젖은 이른바 위정척사파의 세력이 이러한 선각자들

의 과감한 현신 의욕과 노력을 반대하고 시대적 변화에 순응하여 정치체제를

선진화시키려는 여망을 압도하게 되었다. 기회를 노리며 우리나라의

국내정세를 예의 주시하고 있던 청국, 일본, 러시아 등은 그때까지 억누르고

있던 한반도에 대한 야욕을 노골화하기 시작하였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첨병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일본, 러시아 등 이들 외세의 공세를 맞아 아무런

준비가 없던 조선은 이를 자주적으로 능히 극복 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는 이른바 35년간 일제 식민지 지배의 참화였다.

 

그리하여 그 나마 서울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우리의 국제정치와 외교 활동

무대가 동경으로 그 장소 조차도 바뀌고 말았다. 우리 국민들은 그 동안에

외교활동과 그 배경이되는 국제관계에 대하여 견문할 기회마저도 잃고 만

것이다. 외세의 힘으로 찾아 온 한반도의 해방은 즉각적으로 민족과 국토의

분단을 초래하였고, 국민의 예상을 뒤집고, 남한과 북한에 실시된 미국과

소련의 군사 점령기를 맞이하였다. 우여곡절을 거쳐 남북한에 각각 반쪽짜리

단독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3년도 못되어 양 분단 정부 지도층의 오판과

실책으로 6.25 동란이 일어났고, 그로 인하여 남북한 도처는 초토화되고

수백만명의 무고한 동포들이 희생되었다.

 

휴전을 강요당한 대통령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끝까지 주장하면서 휴전협정

당사자로서의 서명을 거부하여, 후일에 북한으로 하여금 휴전협정 관계 협상

당사자 자격으로 부터 남한을 배제시키자고 주장할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이대통령은 미국을 집요하게 압박하여, 휴전을 용인하는

대가로, 한미방위 조약(53.10)을 얻었다. 그후 오늘날 까지 제2차 한국동란

발발을 예방하는데 있어서 이 한.미간 양자 조약의 역할을 평가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고 하겠으나, 역대 정부의 대북 수세 내지 융화 정책과 우리

국군의 군사적 경계태세도 한반도에서의 전쟁 재발 방지에 무시할수 없는

요소이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그 반면에 한미방위 조약은, 이와 대치하게

된 북중방위 조약과 함께, 상호 대결구도를 조성하여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노력에 장애 요소로 역기능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이제 반세기 이상이 경과하여 그 간에 국내외 정세도 크게 변하였으므로

우리는 이러한 변화에 따른 한.미, 북.중 간의 양자조약 체제 전반에 대한,

재검토가 요망되는 시기에 있다. 지금 국내적으로 정쟁의 대상이되고 있는

이른바 대북포용 정책은 대통령 박정희 당시의 7.4 공동성명 때, 북한측의

정치, 군사문제 선논의 주장을 잠재우고, 경제, 사회문제 등 쉬운 문제 논의

선결을 관철시킨 점에 있어서, 그시작은 박대통령 때이었다고 할수있다.

그때 그는 경제건설에 우선 주력하고 국력을 키운 다음에 통일에 필요한

정치 군사 문제를 시기를 보아 본격적으로 또한 주도적으로 북한과

다루자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처럼 시작한 대북 정책은 후대의 정권에 계승되어 지금 처럼 고착화

되었다. 그 때 고 박정희 대통령이 공언한 바와 같이 통일 노력을 적극화할

때가 이미 와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아직도 구태를 과감히 탈피하지 못하고

오히려 남한 내부적 갈등과 정쟁이 요사이 고조되고 있다. 이는 우리

정부와 정당의 대북정책 자정능력 부족, 포괄 적으로 다시 말하면, 대북

정책의 고정화 경향을 수시로 변하는 국제 정세와 세력균형 관계에 맞추어

적시적절하게 개선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유연성과 조정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우리나라 내부 구조의 반영에 다름 아니다.

 

한편, 북한의 경우를 보면, 김일성은 반쪽짜리 단독 정권을 세우자마자

6.25 동란을 은밀히 도발하기 위하여 당시 소련의 스탈린과 중공의 모택동을

찾아다닐 만큼 국외에 대한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이는 남한내의

잡다한 일에만 골몰하던 당시의 남한 정국과 대비할때 그렇다는 것임).

그리하여 전쟁중에는 북측편으로 한국 동란에 참가한 소련과 중공등으로

부터 최대한의 전쟁 지원을 받는데 골몰하였다. 이처럼 시작한 북한의

외교전통은 김일성이 자랑해온 그의 항일무장투쟁 경험을 반영시키는데서

시작 되었다고 할수있고, 거기에 북한 자체의 일인 독재체제와 병영국가적

경영행태가 추가 보강하여 적국적으로 일사불란하게 추진하는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김일성은 스타린의 사망, 그후에 이어진 소련 체제의 구조조정 과정, 소.중

간의 국경분쟁, 소.중을 중심으로 공산권에 대두한 사상논쟁, 중.소간 주도권

경쟁 등 중.소(뒤에 러시아)간 양국 관계에 큰 변화가 있을 때마다 그 사이의

틈새를 이용하여 북한 정권의 실익을 챙기는 줄타기.곡예 외교를 구사

하였다. 이런한 김일성의 일방적 국익추구 때문에 소(러), 중 등은 적지 않은

곤욕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당시 공산 진영의 어느 나라도 북한을 외면하지

못하고 사태를 무마시키는 방향으로 대응할 수 밖에 없었다.

 

김일성(그후의 김정일)의 대남도발 비타협 정책도 이러한 북한의 과거 북방

3각 외교 관계의 연장선상에서 자행된 행태에 다름 아니다. 근래에 북한의

외교 대상국으로 추가된 미국에 대한 북한의 자세와 행태도 위에 요약한

북한 정권의 지난 외교전통을 이해하여야만 그 정체를 분명히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북핵문제 등도 그 예외가 아니며, 현재로 보아 단시일내에

결말을 맺게되기 보다는 더많은 시간과 우여곡절이 예상된다. 그러나 최근의

북한 핵실험을 계기로 미.중.일.러 및 대한민국을 일방으로 하고 북한 정권을

타방으로 하는 5 대 1 의 대치 상황이 한층더 분명하게 된것은 우리에게

전화위복의 상황전환이라 하겠고, 북측이 이 상황을 어느정도 자기 고집대로

버텨 나갈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북한의 외교행태를 검토함에 있어서 우리가 배울점이 있다면, 북한은

상대적으로 약소하고 어려운 처지에 항상 놓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자신의 이익을 시종일관 앞세우고 적극적으로 추구해

나가는 자세이다. 북한은 항상 외교를 국가 총동원 체제로 추진하여

대외적으로 강인한 인상을 조성한다.

 

그에 비하여 우리나라(남한)의 경우 전반적으로 외교는 마치 대통령실이나

외교통상부가 하는 일인 것 처럼 느껴질 정도로 국민적 관심을 동원하지

못하는 가운데 진행되어 왔다. 외교는 국내 정쟁의 대상이 되어서는 강력한

추진력을 발휘할 수 없다. 외교가 여야를 초월하여 거국 외교가 되기

위해서는, 집권 정당과 정부가 먼저 야당들의 적극적 협조를 유도할수 있는

사전 노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국민의 지지와 여론을 선도하는데 앞장서는

자세를 한층 더 강화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외교와 국민간의 관계는 기름과

물같이 이원화 되어서는 안되고, 모두가 기름이 되든지 물이 되는 일원화를

위한 노력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노력은 발상의 전환에 의한 우리나라

외교전통의 혁신으로 인식 될 것이다.

 

동아시아 안보 체제의 시작

 

세계의 대륙인 유라시아, 그 동부라고 할 현재의 중국, (러시아) 시베리아,

일본열도, 한반도 등을 포괄하는 지역은 그 안에 세계문명 발상지를 비롯하여

유라시아의 흥망성쇄를 선도해 온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사람들은 편의상

이 지역을 동아시아라고도 부른다. 19세기 부터 20세기에 걸친 서구

식민지주의 시대가 가고, 21세기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오늘날 이 지역의

중요성은 과거 어느때 보다도 세계적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 세기부터

문명서점설이 학자들 사이에 회자되어 온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고 하겠다.

 

조선시대의 대외정책을 사대교린 (事大交隣) 이라고 하여 흔히 그 부정적

측면을 거론 하기도 하지만, 이를 긍정적으로 보면 한반도의 중간자적 역할을

부각시키는 용어가 된다. 당시에 인류 문명을 선도하던 지역의 문물을

도입하여 주변의 후진 지역에 전파시키는 역할인 것이다. 21세기에는

교통.통신의 발달로 사대와 교린의 대상이 거의 일치하게 되었으므로, 그

통로가 과거와 같이 일방적이 아니고, 4방에 양방향적으로 전개하게

되었지만, 한반도의 그 중간자적 역할 자체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금후에 있어서 동아시아는 또다시 유라시아대륙 나아가서는 전세계의 문화

발전에 지도적 역할을 하도록 자리매김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동아시아가

그러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도 이 지역의 안전과

평화가 확보되어야 함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상황전개를

보면 반드시 낙관할 수 만은 없다. 특히 대륙과 해양을 고루 갖추고 있는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어 국제적으로 뿐 아니라 국내적으로 대립.항쟁

하는 상황에 있어서 이는 동아시아의 안전과 평화에 중요한 장애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좋은 예가 북핵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북핵문제는 근원적으로 한반도의 분단과 분단 상태의 고착에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가 자유.민주.평화의 3대 원칙에 따라

통일되면, 북핵문제는 근본적으로 자동해결될 성질의 것이다. 러시아는 이미

자유민주주의를 택하여 그에 따른 구조 조정이 한창 진행 중이고, 중국은

아직도 1당 독재 체제를 지속하고 있으나 경제는 과감히 자본주의적 개혁,

개방을 지향하고 있다. 일본은 경제적 동물 (Economic Animal) 이라고 불릴

정도로 앞서가고 있지만, 정치에 있어서는 과거의 군국주의적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미국을 등에 업고 동아시아를 다시

제폐하려는 야망을 노골화하고 있다. 또다시 제2의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하는 불명예를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는지 현재의 일본 지도층에게 묻고

싶은 심정이다. 한반도는 이들 세계적 강대국들의 분포도 상에 있어서

지정학적으로 그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문화적으로도 이들 4강의 문명을

하나로 집약하고 있는 지역 이라고 말할수 있다.

 

요컨대 한반도는 금후 동아시아의 전체적 진로에 관하여 결정적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는 전략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외국에서 한반도를 세계적 뉴스 생산 지역이라고 지목할 정도로, 전지구적

규모로 볼때 반도의 좁은 넓이와는 상반되게 동아시아 전체적으로는 물론

전세계적으로도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른바 문제 지역이 되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국민들 중에 어느 정도가 이러한 국제정치적 현상을

진정으로 실감하고 있는지 의문이 앞설 정도이다. 혹시 우리가 우물안의

개구리가 아닌지, 바깥 세계와는 동떨어진 선입관에 억메여 너무 오랫동안

헛된 무사안일 의식에 사로잡혀 온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볼 일이다.

 

위와 같은 간단한 언급만으로도, 현재의 우리 국민들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에

얼마나 중요한 나라 또는 지역에 살고 있는지 이해 되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통일이 아직 안된 것을 이웃 4강이나 북한 또는 과거의 역사에 그

책임을 돌리려 해서는 안된다. 현재 우리는 분열되어 지리멸열한 상태에서

이를 넘어서지 못하고, 본격적으로 통일의 성업에 합심협력하여 나아가는

준비가 아직 되어있지 못함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남북통일의

진정한 시작이 될 것이다. 이리하여 통일이 되면, 아니 우리가 통일을 하면,

그것이 곧 동아시아 안보체제의 진정한 시발점이 될 것임은 일목요연하다.

 

경제, 사회, 문화

 

통일운동에 있어서 국제정치, 국내정치, 또는 군사문제 이외에 경제, 사회,

문화, 인권, 이산가족, 관광 등을 결코 경시할 수 없다. 지금까지의 이 분야

활동이 남북간의 대결의식을 완화시키고 남북간의 상호에 대한 편견을 많이

완화시킨 업적은 인정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남북간의 경제, 사회, 문화 관계

증진 만으로 통일의 궁극적 목표가 달성되려면 무한한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한다. 아쉽게도 우리에게는 그러한 여유가 없다. 왜냐하면 남북한은 그

동안에 모두 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소를 물가로 끌고 가는데 소의 꼬리를 잡아 당겨서는 천하장사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와 반대로 소의 코뚜레를 잡아 끌면 삼척 동자도 성공할 수

있다. 국제정치, 국내정치 및 남북간 군사문제가 해결되면 한반도의 경제,

사회, 문화 등 기타 모든 문제는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듯 (上善若水)

자연스럽게 풀려나갈 것이다.

 

이제는 "퍼주기" 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는 하부구조적 남북교류 관계는

자제하고 남는 에너지와 경비를 상부구조라고 할 세가지 과업에 집중투자

할 때가 왔다. 그것은 6자간의 한반도에 대한 집단안전보장 조약 체결,

한반도내의 두 정부를 하나로 만드는 정부통일, 남북의 군대를 통합

재배치하고 휴전선을 철폐하는 군사문제 해결이다. 또 이 과업은, 남북한

양자간에서 만으로 달성할 수 없음이 이제 명백해졌으므로, 지체없이 6자

회담에 남북 통일 문제를 상정하여 그들의 협조를 받으며 달성하는 길이

첩경이다. 남한이 움직이면, 남어지 5자는 모두 동조 할 것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다.

 

- 끝 -